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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존의 비밀

나 그 네 2011. 4. 1. 12:59

 

스트라이크존의 비밀

“스트~ 라이크!”

야구장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육중한 체구의 심판원이 요란한 제스처와 함께 몸통 전체에서 울리는 듯 큰소리로 스트라이크를 선언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판정은 야구 경기에서 심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주요한 내용이다. 3시간 남짓한 경기 시간 동안 야구공은 마운드와 포수 미트 사이에서 300회 정도 오간다. 그리고 수만 관중의 시선은 넓은 경기장 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영역인 홈플레이트 위의 공간에 집중되게 마련이다. 그만큼 야구에서 스트라이크 볼 판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고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쉽지 않다.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에 따라 그날 투수와 타자의 성적은 물론 양 팀의 경기 결과, 심지어는 심판에게 쏟아지는 악플의 개수까지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야구에서 가장 논쟁적인 영역이자 온갖 다툼과 항의, 숱한 퇴장의 근원이기도 한 스트라이크존의 기준과 변천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야구 팬들이 스트라이크존에 대해 갖는 오해와 한미일 프로야구의 스트라이크존이 각기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보려고 한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은 종종 투수와 포수, 타자와 감독에게 거센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야구 규칙에서는 스트라이크/볼의 판정은 주심의 고유 권한이며 항의할 경우 퇴장까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사진: 송승현>

 

 

대원칙: 타자가 칠 수 있는 범위

스트라이크존을 규정하는 건 매우 간단한 일처럼 보인다. 야구 규칙 2.73은 스트라이크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니폼의 어깨 윗부분과 바지 윗부분 중간의 수평선을 상한선으로 하고, 무릎 아랫부분을 하한선으로 하는 홈 플레이트 상공을 말한다. 스트라이크존은 투구를 치려는 타자의 스탠스에 따라 결정된다.”

즉, 흔히 동네야구에서 우기듯 포수가 공을 포구한 위치가 아니라 홈플레이트 위 가상의 3차원 공간이 스트라이크존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시속 140km대의 빠른 볼이 정말로 플레이트 위를 통과했는지, 아니면 살짝 걸쳤는지 여부를 사람의 눈이 기계처럼 정확하게 감지하기는 어렵다. 또한 존의 높낮이도 규칙에서는 ‘수평선’, ‘무릎 아랫부분’, ‘타자의 스탠스’ 등의 표현으로 사실상 심판의 판단에 맡겨두고 있다. 어디까지가 무릎 아래인,지 어깨와 벨트 사이 수평선이 어느 지점인지 하는 판단은 심판 개개인이 하게 된다. 심판에 따라 스트라이크존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중계방송과 문자중계에서 그래픽으로 보여 주는 고정된 크기의 직사각형이 단지 ‘참고용’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규석 대한야구협회 기술이사는 스트라이크존을 매우 간단하게 정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스트라이크는 “타자가 칠 수 있는 범위로 들어오는 공”이다. 이는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도 정확한 설명이다. 실제 야구 역사를 되짚어 보면 스트라이크와 볼의 구분은 투수로 하여금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지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1860년대 처음 볼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을 때 이는 타자가 칠 수 없는 공을 계속 던지면서 시간을 끄는 투수에 대한 페널티였다. 1871년 원시적인 스트라이크존이 등장했을 때 볼은 타자가 투수에게 던져 달라고 요구한 대로 들어오지 않은 공을 의미했다. 지금으로 치면 당연히 스트라이크가 될 만한 코스의 공도 타자가 다른 코스를 요구했다면 볼로 처리했다는 얘기다. 물론 오늘날의 야구가 그때와 여러모로 달라지기는 했지만 ‘타자의 타격 범위’라는 스트라이크의 기본 원칙은 동일하다.

 

공식 스트라이크존 규정. 타자의 어깨 위부터 벨트까지의 중간선과 무릎 아래 사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한 공이 스트라이크로 선언된다. 하지만 실제 적용은 각 리그와 경기의 수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출처: Num at en.wikipedia.org>

 

 

이런 원칙만 염두에 두면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많은 의문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다시 말해 스트라이크존이 하나의 형태로 고정되지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계속 변화와 조정을 거듭한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타자들의 방망이가 도저히 투수를 당해 내지 못한다 싶을 때면 스트라이크존은 좁아졌다. 반대로 타자들이 너무 강해서 투수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됐을 때는 어김없이 존을 넓히는 조처가 취해졌다. 결국 스트라이크존은 기준금리로 물가를 조절하는 중앙은행처럼 투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강해지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투타의 균형 여부, 경기 수준의 차이에 따라 스트라이크존이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규석 이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리틀야구라고 스트라이크존 규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틀이랑 프로랑 똑같이 볼 판정을 해야 하나? 리틀리그에서는 (스트라이크존을)넓게 보는 게 심판을 잘 보는 거다. 만약 리틀리그에서 프로처럼 스트라이크존을 적용하면 절대 경기가 끝나지 않는다.” 

 

 

스트라이크존 만들기

그렇다면 실제 경기에서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이규석 기술이사는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을 “경기를 진행하면서 다듬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야구 경기를 1회부터 9회까지로 놓고 볼 때 1회에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급적 존을 넓게 봐야 한다. 왜냐. 경기 후반에 정말 중요하고 긴장되는 상황이 되면 존이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포스트시즌 때면 유독 스트라이크존이 좁아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만약 심판이 경기 시작부터 존을 지나치게 타이트하게 잡으면 그 경기는 필연적으로 오래 걸리고 피곤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경기 중간에 갑자기 존을 넓혀 버리면 일관성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처음에는 넓게 보다가 경기를 하면서 조금씩 다듬어 존을 만들고 그 존을 경기 후반에 집중력을 갖고 유지하는 거다.” 이규석 기술이사의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경기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심판 개개인의 경험과 판단을 원칙으로 하되 경기를 보는 이들이 수긍할 수 있는 선은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공이나 마운드 앞에서 바운드된 공을 스트라이크로 선언한다면, 그날 처음 야구를 보러 온 관중이라도 수긍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심판이 존을 ‘만드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어떤 유형의 투수인지 어떤 구종을 던지는지, 어느 코스를 잘 던지고 컨트롤은 어떤지 심판은 모두 머릿속에 넣어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심판들은 구단 동계훈련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경기 시작 전에도 그날 나올 투수의 피칭을 보며 판정의 감을 익힌다. 간혹 신인 투수나 새로 선보이는 외국인 투수가 판정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심판과 투수가 서로 ‘생소한’ 상태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수도 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은 심판 본인만이 아니라 공을 던지는 투수와 포수, 타자의 '협조'를 통해 경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때로 심판은 경기 상황에 따라 스트라이크존을 조정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스트라이크존을 맡겨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진: 손윤>

 

 

컨트롤이 뛰어난 투수는 심판이 스트라이크존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공이 스트라이크존 범위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심판이 어디까지가 볼이고 어디까지가 스트라이크인지 정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예전에는 장명부이상군 같은 투수들의 불펜 피칭을 보며 판정의 감을 잡는 심판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메이저리그의 톰 글래빈(Thomas Michael Glavine)이나 그레그 매덕스(Gregory Alan Maddux) 같은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들은 경기가 시작되면 여러 코스에 공을 찔러 보며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을 ‘테스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심판 쪽에서 보면 글래빈 등이 한 일은 주심이 그날의 스트라이크존을 만드는 데 ‘협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투수들이 던지는 날 심판은 그날의 존을 빨리 만들 수 있고 보다 정확한 판정을 내릴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경기도 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컨트롤이 나쁜 투수는 팀 동료나 관중들은 물론 심판에게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제구력이 형편없는 투수는 심판이 슬럼프를 겪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심판의 스트라이크존 감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공이 어디로 올지 알 수 없는 투수를 만나면 경기는 경기대로 늘어지고 심판도 감을 잃는다. 나중에는 어쩌다 제대로 된 공이 들어와도 손이 올라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제구력이 좋은 투수는 계속 득을 보고 제구력이 나쁜 투수는 계속 손해를 보게 된달까.”

 

스트라이크존 좌우의 폭도 중요한 요소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몸쪽은 타자들이 가장 치기 힘든 코스”라며 “몸쪽 볼을 여유 있게 잡아 주면 제대로 칠 수 있는 타자는 아무도 없다”고 설명한다.조종규 KBO 심판위원장도 "지금은 세계적인 추세가 몸쪽을 좁게 보는 편"이라며 "바깥쪽은 공 1개 정도 걸치는 건 스트라이크로 하지만 몸쪽은 좁게 본다"고 말했다. 반대로 바깥쪽은 타자들이 상대적으로 쳐 내기 수월하다. 이에 따라 심판의 실제 스트라이크존은 좌우 대칭의 사각형이 아닌, 바깥쪽은 약간 넓고 몸쪽은 좁은 형태를 이루게 된다. ‘타자가 칠 수 있는 범위’라는 스트라이크존의 의미를 다시 한번 따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심판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뿌리 깊은 일부 팬은 “차라리 볼 판정을 기계에게 맡길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은 투타의 밸런스, 리그의 수준, 선수들의 능력, 구종과 코스, 타자의 위치 등 수많은 변수를 반영한 결과이며 기계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다. 만일 기계가 심판을 본다면 리틀야구 경기는 하루 종일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고 초반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경기는 한없이 지루하게 늘어질 것이며, 투수들이 뿌려 대는 몸쪽 스트라이크에 타자들의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심판은 판정을 내릴 뿐만 아니라 경기가 무난하게 끝날 수 있도록 하는 ‘조정자’ 구실도 한다. 야구도 결국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물론 심판이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미국에서 나온 한 통계에 따르면 심판의 이동 거리가 늘어날수록 스트라이크 볼 판정의 정확도가 크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이규석 기술이사는 “심판의 컨디션도 판정에 영향을 준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무더운 날씨에는 심판의 자세가 자꾸만 아래로 처진다. 그렇게 머리가 낮아지면 자연히 정확한 스트라이크 판정을 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 교본에 나온 올바른 자세를 취하지 않거나 잘못된 위치 선정으로 포수에 가려서 플레이트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과거 메이저리그에서는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 심판들이 스트라이크존에 큰 차이를 보였는데 이는 양쪽 심판들이 서로 다른 형태의 보호 장비를 착용하다 보니 자세와 머리의 위치가 달라서 생긴 일이었다.

 

심판은 정확한 볼 판정을 위해 경기 내내 고개를 들고 웅크리는 '교과서적' 자세를 취한다. 체력이 떨어지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심판의 자세는 계속 낮아지며, 이는 볼 판정의 일관성을 해치는 큰 원인이 된다. <사진: 이응수>

 

 

최근 들어 중계방송 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이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도마에 오른다. 과거에는 경기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동의’만으로 충분했다면 이제는 TV로 경기를 지켜보는 수십만의 시선 앞에서 판정을 내려야 하는 시대다. 그래서 스트라이크존의 일관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방송이나 인터넷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소신을 갖고 공정성과 일관성을 지키면 된다”고 충고한다. “간혹 PD나 아나운서 에게 항의하는 심판들이 있는데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분들이 심판을 ‘도와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방송사가 심판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같은 장면을 계속 보여 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 지적이 나오는 건 일관성이 없다고 심판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받아들이라는 거다. 그래서 경기 끝난 뒤에 어느 부분이 잘못됐는지 검토하고 다음 경기 때는 좀 더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판정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심판들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심판과 함께 선수와 코칭스태프, 야구 관계자, 팬들에게도 보다 성숙하고 여유 있는 ‘야구 문화’가 요구된다. 스트라이크 판정은 심판 고유의 권한이자 영역이라는 점을 늘 새겨 둬야 할 필요가 있다. 심판을 흔들 목적으로 사소한 볼 판정 하나에 과도하게 항의하거나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비난을 퍼붓는 행위는 심판은 물론 야구 발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야구에서 스트라이크존을 ‘완벽한’ 기계가 아닌 ‘불완전한’ 사람에게 맡겨둔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관련글 : 그라운드의 중재자, 심판 <경기의 중재자이자 그라운드의 선생님>

 

 

 

배지헌
배지헌은 야구 전문 블로그 <야구라>의 필진으로 활동 중이다. [야구생활], [스카우팅 리포트 베이스볼 2011] 등의 필진으로 참여했으며, 현재 네이트 스포츠 Pub에 기고하고 있다.


발행일
2011.03.31

 

감수 신명철 (前 스포츠 2.0 편집위원)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052&path=|190|&leafId=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