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트롤이 뛰어난 투수는 심판이 스트라이크존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공이 스트라이크존 범위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심판이 어디까지가 볼이고 어디까지가 스트라이크인지 정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예전에는 장명부나 이상군 같은 투수들의 불펜 피칭을 보며 판정의 감을 잡는 심판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메이저리그의 톰 글래빈(Thomas Michael Glavine)이나 그레그 매덕스(Gregory Alan Maddux) 같은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들은 경기가 시작되면 여러 코스에 공을 찔러 보며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을 ‘테스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심판 쪽에서 보면 글래빈 등이 한 일은 주심이 그날의 스트라이크존을 만드는 데 ‘협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투수들이 던지는 날 심판은 그날의 존을 빨리 만들 수 있고 보다 정확한 판정을 내릴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경기도 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컨트롤이 나쁜 투수는 팀 동료나 관중들은 물론 심판에게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제구력이 형편없는 투수는 심판이 슬럼프를 겪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심판의 스트라이크존 감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공이 어디로 올지 알 수 없는 투수를 만나면 경기는 경기대로 늘어지고 심판도 감을 잃는다. 나중에는 어쩌다 제대로 된 공이 들어와도 손이 올라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제구력이 좋은 투수는 계속 득을 보고 제구력이 나쁜 투수는 계속 손해를 보게 된달까.”
스트라이크존 좌우의 폭도 중요한 요소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몸쪽은 타자들이 가장 치기 힘든 코스”라며 “몸쪽 볼을 여유 있게 잡아 주면 제대로 칠 수 있는 타자는 아무도 없다”고 설명한다.조종규 KBO 심판위원장도 "지금은 세계적인 추세가 몸쪽을 좁게 보는 편"이라며 "바깥쪽은 공 1개 정도 걸치는 건 스트라이크로 하지만 몸쪽은 좁게 본다"고 말했다. 반대로 바깥쪽은 타자들이 상대적으로 쳐 내기 수월하다. 이에 따라 심판의 실제 스트라이크존은 좌우 대칭의 사각형이 아닌, 바깥쪽은 약간 넓고 몸쪽은 좁은 형태를 이루게 된다. ‘타자가 칠 수 있는 범위’라는 스트라이크존의 의미를 다시 한번 따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심판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뿌리 깊은 일부 팬은 “차라리 볼 판정을 기계에게 맡길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은 투타의 밸런스, 리그의 수준, 선수들의 능력, 구종과 코스, 타자의 위치 등 수많은 변수를 반영한 결과이며 기계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다. 만일 기계가 심판을 본다면 리틀야구 경기는 하루 종일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고 초반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경기는 한없이 지루하게 늘어질 것이며, 투수들이 뿌려 대는 몸쪽 스트라이크에 타자들의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심판은 판정을 내릴 뿐만 아니라 경기가 무난하게 끝날 수 있도록 하는 ‘조정자’ 구실도 한다. 야구도 결국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물론 심판이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미국에서 나온 한 통계에 따르면 심판의 이동 거리가 늘어날수록 스트라이크 볼 판정의 정확도가 크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이규석 기술이사는 “심판의 컨디션도 판정에 영향을 준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무더운 날씨에는 심판의 자세가 자꾸만 아래로 처진다. 그렇게 머리가 낮아지면 자연히 정확한 스트라이크 판정을 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 교본에 나온 올바른 자세를 취하지 않거나 잘못된 위치 선정으로 포수에 가려서 플레이트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과거 메이저리그에서는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 심판들이 스트라이크존에 큰 차이를 보였는데 이는 양쪽 심판들이 서로 다른 형태의 보호 장비를 착용하다 보니 자세와 머리의 위치가 달라서 생긴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