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온통 아름답고 다양한 색을 띠는 것으로 가득 차있다. 물체의 색은 대부분 빛의 흡수와 반사에 의한 것이다. 산-염기 중화적정에서 사용되는 지시약의 색 변화로 당량점을 구하듯이, 색깔 변화는 화학물질의 검출에도 이용된다. | |
우리가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빛은 파장이 약 400 ~ 800 nm인 전자기파이다. 이를 가시광선이라고 하는데, 무지개의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순서로 파장이 짧다. 빛의 광자 에너지의 크기 순서는 이와 반대이다. 백색의 빛은 이들 무지개 색의 혼합이다. 색을 띠는 물체는 가시광선의 일부 파장의 빛은 흡수하고, 나머지 파장의 빛은 반사(산란)시킨다. 우리가 물체를 보고 색을 감지하는 것은, 반사된 빛이 망막에 있는 빨강, 초록, 파란색의 빛에 민감하게 감응하는 세 가지 세포에 들어있는 색소 물질에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이것이 물리적 신호로 변환되어 뇌신경에 전달되는 것이다. 이 세가지 세포에 대한 자극 값에 따라 다른 색을 느끼게 된다. 흡수하는 빛의 색과 반사되는 빛의 색은 서로 보색관계에 있다. 빨강, 초록, 파랑은 빛의 삼원색이다. 이 세 가지 빛의 혼합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의 빛이 얻어진다. 물감의 삼원색은 빨강, 파랑, 노랑이며, 이를 섞어 다양한 색깔을 낼 수 있다. | |
빛의 삼원색(왼쪽)과 물감의 삼원색(오른쪽)
어떤 물체가 색을 띠기 위해서는 가시광선 영역의 빛을 흡수하여야 한다. 위의 삼원색 그림으로 보면, 빨간색과 파란색을 흡수하면 녹색만 반사되므로 녹색으로 보인다. 또 녹색을 흡수하면, 빨강색과 파란색이 반사되어 이들의 합인 보라색으로 보인다. 식물의 잎이 녹색으로 보이는 것은 엽록소가 빨강 색과 파란색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이론에 따르면, 원자나 분자의 에너지는 특정한 값만 가질 수 있도록 양자화(quantized) 되어 있다. 그리고 낮은 에너지 상태에 있는 원자나 분자는 높은 에너지 상태(들뜬 상태)와의 에너지 차이에 해당하는 파장의 빛을 받으면 이들 흡수하여 들뜨게 된다.
가시광선을 흡수하여 색을 띠는 화합물의 한 가지 유형은 전이금속(transition metal) 착화합물이다. 전이금속이란 철, 구리, 코발트, 니켈 등 주기율표의 가운데에 있는 금속들을 말하는 것이고, 이런 전이금속 이온을 다른 이온이나 분자들이 둘러싸 결합한 화합물을 착화합물이라고 한다.
전이금속 이온의 외곽에 있는 d-전자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 값은 착화합물이 되면 이온 단독 상태일 때와는 달리 갈라지게 된다. 갈라진 에너지 값의 간격은 가시광선이 가진 에너지와 비슷하게 된다. 그래서 전이금속의 착화합물은 특정한 가시광선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전이금속의 착화합물의 종류에 따라서 흡수하는 가시광선의 파장이 달라진다. 따라서 전이금속의 착화합물은 다양한 색을 내게 된다. | |
유기 화합물들도 여러 색을 띤다. 이들은 아래의 식물의 주요 색소의 구조식에서 보듯이, 단일 결합과 이중 결합이 길게 번갈아 있는 경우이다. 단일 결합과 이중 결합이 번갈아 있는 결합을 콘쥬게이션(컨주게이션) 이중 결합(conjugated double bond)이라고 한다. 따라서 색을 띠는 유기 화합물들은 긴 콘쥬게이션 이중결합을 갖고 있는 화합물들이다.
이중 결합 중 한 결합에 관여하는 전자는 파이 전자이다. 콘쥬게이션 이중 결합에서, 이 파이 전자는 사실은 특정한 원자에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슬 전체를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사슬의 길이가 길수록 파이 전자는 보다 긴 거리로 움직일 수 있다. 자유전자모델(free-electron model)에 따르면, 콘쥬게이션된 이중결합 사슬의 길이가 길수록 작은 에너지를 가진, 긴 파장의 빛을 흡수한다. 그래서 보다 짧은 파장의 빛의 색으로 보이게 된다. 식물들은 아래에서 보여준 기본 골격 색소화합물에서 콘쥬게이션 이중결합의 길이를 변화시키거나, 치환기를 붙이거나, 또는 다른 화학종과 착화합물을 만들어 이들의 에너지를 변화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색을 만들어 낸다. | |
식물에 존재하는 주요 유기 색소화합물의 구조.(가), 카로티노이드의 일종인 β-카로틴(R=H)과 크산토필의 일종인 루테인(lutein)(R=OH);(나),
꽃과 과일의 색소인 안토시아닌을 이루는 안토시아니딘의 골격, (다), 엽록소와 헤모글로빈의 헴을 이루는 포피린의 골격(고리 중앙에 엽록소는
마그네슘 이온이, 헤모글로빈은 철 이온이 질소 원자와 배위되어 있다.), (라) 리트머스의 한 성분인 아조리트민의 공명 구조
산-염기 지시약인 리트머스(litmus)는 이끼에서 추출한 여러 염료의 혼합물이다. 이중 한 성분인 아조리트민(azolitmin)은 리트머스와 거의 같이 산성과 염기성에서 색깔이 다르다. 염기성에서의 아조리트민의 구조는 구조식(라)와 같다. 구조식 (라)의 아래처럼 질소원자의 비공유 전자가 공명 구조에 관여하여 콘쥬게이션 이중결합이 길게 분자 전체에 걸쳐있다. 그러나, 산성에서는 질소 원자에 양성자가 결합하여 그림(라)의 아래와 같은 공명구조를 가질 수 없고, 콘쥬게이션은 페닐 고리에만 있게 된다.
따라서 염기성에서는 낮은 에너지인 붉은 빛을 흡수하여 푸르게 보이나, 산성에서는 높은 에너지인 푸른 빛을 흡수하여 빨강 색으로 보인다. pH에 따라 색이 변하는 분자들은 대부분 약산 또는 약염기로 작용하는 부분을 갖고 있고, 이 부분의 산-염기 반응 또는 분자 구조 변화에 따라 리트머스에서 보듯이 콘쥬게이션 이중결합 길이가 달라져 색이 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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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머스 시험지, 왼쪽은 염기성 가운데는 중성 오른쪽은 산성 | |
식물의 잎에는 엽록소(chlorophyll) 외에도 주황색인 카로티노이드(carotenoid), 노랑색인 크산토필(xanthophylls)이 들어 있다. 이들의 양에 따라 살아있는 식물의 잎도 녹색뿐만 아니라 다른 색을 보이기도 한다. 녹색의 잎에서는 다른 색소들이 엽록소의 녹색에 묻혀 잘 보이지 않다가, 가을에 잎에서 엽록소가 파괴하기 시작하면 다른 색소들, 즉 주황색이나 노란색들이 보이게 된다. 붉은 색 단풍은 이 시기에 빨강 색의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들게 된다. | |
식물의 잎에서 추출한 안토시아닌 <출처: NAS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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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시아닌(anthocyanin)은 식물의 꽃과 열매, 잎 등에 들어 있으며, 빨강, 보라, 파란색을 내는 색소 화합물이다. 이 화합물은 보통 안토시아니딘(구조식 나)의 3번 위치의 OH기에 포도당이 결합되어 있다. 안토시아니딘은 치환기의 종류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예를 들면, (나)의 구조식에서 R1과 R2가 모두 수소(H)인 주황색의 페라르고니딘(pelargonidin), R1은 OH이고 R2가 H인 적자색의 시아니딘(cyanidin), 그리고 이들이 모두 OH인 청자색의 델피니딘(delphinidin)등이 있다. 최근에 일본에서 파란 장미를 만들었는데, 이는 원래의 장미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델피니딘을 축적시키는 유전자를 장미에 도입한 것이다.
안토시아닌은 생체에서 강력한 항 산화작용을 보이며, 암, 노화, 당뇨 등 여러 질환에 대해 좋은 효과를 보인다는 실험보고가 있다. 이런 이유로 안토시아닌이 많이 들어있는 검은 콩, 보라색 옥수수, 짙은 색의 나무 및 덩굴 열매가 건강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 |
안토시아닌은 용액의 pH에 따라 색이 변한다. 안토시아닌의 방향족 고리에 결합된 OH기가 페놀의 OH기와 마찬가지로 염기성에서 해리되기 때문이다. 빨강색 안토시아닌은 리트머스처럼 산성에서는 붉은색, 염기성에서는 푸른색이다. 따라서, 꽃에서 추출된 색소를 pH 지시약으로 쓸 수 있다. | |
빨강 장미와 푸른 수레 국화에서 분리된 안토시아니딘은 시아니딘으로 같은 물질이다. 이들의 색깔 차이를 세포의 pH 차이로 설명하기도 하였으나, 수레국화에서 색소가 있는 부분의 pH를 측정한 결과, pH 4.6으로 푸른 색을 낼 정도로 pH가 높지 않았다. 수레 국화의 푸른 색은 시아니딘, 보조 색소, 그리고 철, 마그네슘, 칼슘의 금속 이온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구조의 착화합물 형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꽃의 색 변화에 금속이온이 관여하는 대표적인 예가 수국(hydrangea)이다. 수국 꽃의 색은 델피니딘에 의한 것인데, 자라는 땅의 pH에 따라 자홍 색에서 청색까지 아주 다양하다. 이러한 색의 차이는 색소 주변의 알루미늄 이온(Al3+)에 의한 것이다. 흙에는 알루미늄 성분이 들어있는데,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Al(OH)3로 되어 물에 녹지 않고 뿌리에서 흡수되지 않아 꽃은 자홍색이나, 산성 토양에서는 알루미늄 이온이 흡수되어 델피니딘과 착화합물을 만들어 청색을 띤다. 땅의 산성도를 변화시키면 알루미늄 이온의 흡수 정도를 변화시켜 수국 꽃의 색을 바꿀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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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의 색은 다양하다. <출처: NGD> | |
산-염기 지시약은 용액 속의 수소이온 농도에 따라, 그리고 수국은 알루미늄 이온의 농도에 따라 다른 색을 보인다. 어떤 염료에 특정 화학 물질이 결합하여 색이 변하면, 그 염료는 그 물질을 검출하는 화학 센서로 이용될 수 있다. 소변 검사를 할 때 사용하는 작은 조각에는 소변의 수소이온, 당, 단백질의 양에 따라 색이 변하는 여러 지시약이 띠로 칠해져 있다. 이와 같은 화학 센서를 만드는 데는 낮은 농도에서도 특정 물질과 선택적으로 강하게 결합하여 색이 변하는 염료의 고안과 합성이 주된 관건이다. 다양한 환경 및 생리 활성 물질을 높은 감도로 색 변화로 검출하는 화학센서를 개발하는 것도 현대 화학의 분야중의 하나이다. | |
- 글 박준우 / 이화여대 화학-나노과학과 교수
-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템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화학-나노과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뮤코다당류의 생화학과 생물리학>이 있고, 역서로 <젊은 과학도에 드리는 조언> 등이 있다.
발행일 2009.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