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지리산 이야기

진주 예찬...리영희의 "어느 진주 기생의 교훈"

나 그 네 2017. 10. 2. 15:15

주변의 곁다리 이야기가 핵심을 찌를 수도 있고,

어느 한 소소한 일화가 수백 수천의 명문을 누를 수 있습니다.

리영희 교수의 "어느 진주 기생의 교훈"은 바로 '진주'에 관한 이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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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3년 기록하여 1988년 창비사에서 펴낸 "역정​- 나의 청년시대"에는.

1950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 때문에 진주에 있으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에세이로서도 뛰어난 문학성을 갖추어 어디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글읽는 맛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면 '고등학교의 추억'이 달라질 것입니다.​

 

군인만능의 사상과 풍조가 지배하던 때 허리에 권총을 차고 나니 나도 공연히 우쭐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기분으로 마음이 들떠 있던 나에게 진주의 어느 날 밤의 일은 진정한 인간적 용기 앞에 무기와 폭력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날 밤엔 보름을 지난 초겨울의 달이 진주남강을 교교히 내리비치고 있었다.

나는 연대 본부 장교들과 어울려서 들뜬 기분으로 남강 다리를 지나, 구진주 시내의 골목을 돌아 들어간 어느 술집 대문 앞에서 지프를 세웠다.

미리 찾아들어온 장교들의 귀에 익은 목소리에 섞여서 웃고 지껄이는 여자들의 소리가 왁자지껄 대문 밖까지 들려왔다.

어떤 향락을 예감하는 흥분이 나의 온몸에 짜릿하게 번져왔다.


 지리산 공비토벌 임무에 투입된 몇 달간 전투는 쉴 새 없이 계속되었고,
기습공격을 받은 슬픔이 가신 뒤의 어느날,

오익경 연대장은 연대본부 장교들의 사기를 돋우고 그간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진주 기생'들의 분내를 맡을 술자리를 벌인 것이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진주시는 변변한 술집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중에서 그래도 권번을 나온 기생들이 몇 있다고 소문난 술집에서 판이 벌어졌다.

20명 가까운 장교들에게 고루 하나씩 돌아가도록, 모자라는 기생은 여기저기서 불러 모아놓았다.

전쟁터를 누비고 살아온 젊은 혈기의 사나이들에게는 이것은 예사 밤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까지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별로 하지 않았다.

먹고 싶어서 술을 찾아 마신 일은 아직 없었다.

그랬던 나도 그날 밤은 논개의 후예들이 따르는 술잔을 거푸 받아 마셨고, 값싼 분내에 취하여 제법 사내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늉도 해보였다.

전쟁이 아직도 진행중인 이곳에서 위수사령부인 연대장교들은 소위건 소령이건 모두 장군이나 된 기분이었고,

취기가 한 차례 돈 우리의 눈에는 미추를 가릴 것 없이 그 자리의 여인은 모두 논개의  후예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그중에서도 연대장 오익경 대령과 나의 옆에는 진짜 권번 출신의 기생이 자리를 잡았다.

몇몇 상급자를 제처놓고 나에게 그런 '영광'이 안겨진 까닭은 연대장과의 개인적 관계 때문이었다.

전투병과 장교들과는 달리, 연대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거나 다른 장교들과의 직업적 라이벌 의식이 필요치 않은 통역장교인 나는

이 같은 비공식 좌석에서는 다른 병과 장교들의 사양으로 흔히 연대장 옆에 앉기 마련이었다.

연대장 역시, 상하 계급관계와 명령계통이 분명한 부하들보다 자기에게 자유롭게 구는 '반 군인, 반 민간인'인 내가 편했는지도 모른다.

런 관계로 내옆에 앉게된 권번기생은 나보다 나이는 여러 살 위였지만 용모나 허위대가 마음을 끌었다.

노는 가락도 과연 어렸을 적에 권번에 들어가 기생수양을 했다는 말대로 어딘지 다른데가 있었다.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흥이 한창 무르익을 무럽 술 기운을 빌어 그녀에게 이자리가 파한 뒤에 '둘이서 따로 자리를 같이하자'고 청했다.

사실 취하기도 했었다.

군인이 왕이었던 전투지역에서 나의 요청은 차라리 '명령' 일 수도 있는 때였다.

'장군'의 소청에 '논개'는 몇번이고 말을  흐리던 끝에 마침내 동의하였다.

적어도 장군에게는 동의한 것으로 들렸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자리가 파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 나는 취기가 돌았고,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고, 여자들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약속을 믿고 기대가 부풀었던 만큼 기어이 찾아내어 약속을 이행시켜야 겠다는 심술이 생겼다.

나는 그녀의 집을 여자들에게 물어 대충 머리 속에 약도를 그려놓고는 밖으로 나와 지프를 몰았다.


 논개의 집은 구시가의 북쪽, 주택구역을 좀 벗어나 남강 다리 왼편으로 한참 가서, 남강을 바로 내려다보는 급한 언덕 위에 있었다.

그 언덕에서 마주보는 쪽에는 신시가 구역에 드는 무성한 대나무 밭이 강둑을 덮고 있었고, 그 아래는 상당히 길고 넒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모래사장이 얼마전 고문관 메인 소령이 나에게 권총사격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던 곳이다.)

 깍아지른 듯한 높은 언덕에서 막히는 골목에 차를 세운 나는 싸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은 함석으로 지붕을 이은 초라한 흙벽집이었고, 마당에는 닳아서 번들번들해진 돌이 울퉁불퉁 깔려있었다.

그 마당에서 상당히 높은 토방이 작은 방 두개를 높이 떠받들고 있는 듯한 구조였다.

유난히 밝은 달이 남강 가 대밭 높이 싸늘한 하늘에 걸린 채 그 집을 정면에서 내리비추고 있어 집과 마당이 연푸른 빛에 싸여 있었다.


 나는 처음에 조용히 불렀다.
"여보세요, 집에 돌아 왔어요? 아까 연대장과 함께 있던 이중위요."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술좌석에서 소개된 그녀의 예명을 불렀으리라 생각된다,

방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잠시 어리둥절해진 나는 소리를 높여 불렀다.
 "말도 없이 없어진다니 무슨일이요? 약속한 대로 빨리 나갑시다. 빨리 나오시오."

 한참 만에 인기척이 있더니 돌쩌귀 긁는 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열렸다.

나는 빨리 나서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여자는 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툇마루에 나와 서더니 마당에 버티고 서있는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보름이 막 지난 밤의 밝다 못해 푸른 기마저 감도는 교교한 달빚에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자태는,

조금 전까지 나에게 술잔을 권하던 기생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위엄에 싸여있었다.

범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나를 압도해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기상에 눌리기 시작한것을 느낀 나는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나의 위치를 회복하려 했다.

느닷없이 빼든 권총 끝에서 섬광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마당 한 끝에서 불꽃과 함꼐 폭발소리가 일었다.

총소리는 남강 위의 겨울 하늘에 공허한 메아리로 번져나갔다.

순간적인 사태에 깜짝 놀란 운전병 조하사가 싸리문밖에서 뛰어들면서 나의 팔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 중위님, 이 중위님....."을 되풀이 했다.

권총을 밀어 넣은 나는 토방으로 다가서면서 소리쳤다.


 "가! 약속했잖아! 누구를 놀리는 거야?"


 나는 나를 묶고 있던 여자의 주술의 끈이 총소리로 흩날려 버린것을 느꼈다.

그리고 총소리에 기겁한 논개의 후예가 허둥지둥 뛰어내려와 장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리라고 기다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자는 높은 툇마루에서 자태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홀연히 서서 나를 내려다볼 뿐이 아닌가!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한참 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젊은 장교님, 아무리 하찮은 기생이라도 그렇게 흐트러진 마음과 몸으로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진주기생을 잘못 보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그렇게 천하게 굴지도 않습니다." 


 돌처럼 굳어지고 정수리에서 술기가 싹 가셔버린 내가 벼락을 맞은 듯 서서 움직일 줄 모르자,

그녀는 다시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젊은 장교님,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마세요.

여자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 내지 않아도 따라갑니다.

당신도 차차 사람과 세상을 알게 될 겁니다.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나는 그녀의 너무도 당당한 기품과 위엄에 눌려 대답할 용기를 잃고 있었다.

하찮게 보고 덤볐던 자신이 너무도 왜소해져, 자신의 전존재가 나의 내면에서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의 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맨손의 진정한 용자(勇子) 앞에서 가장 비겁한 존재가 되어버린 권총 찬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 졌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 다음,

깊은 절로 한 기생의 인격적 위대함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고 발을 돌려 싸리 문을 젖히고 나왔다.


 

각 문장의 표현도 표현이고 글을 이끌어가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도 대단하지만,

마지막 문장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 다음,

깊은 절로 한 기생의 인격적 위대함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고 발을 돌려 싸리 문을 젖히고 나왔다."​는 어디서 또 따로 볼 수 있을까나...

​어디서 또 이런 진주예찬을 만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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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한길사 판(리영희 저작집 6 - 역정(나의 청년 시대))은 아래와 같습니다.

 *1988년 글은 여기에서 모셔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