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영화감독 강우석

나 그 네 2009. 1. 19. 13:02

 

영화인 강우석

 

 



 

강우석 감독은 꽤 일찍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에 매혹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란 영화는 다 보셨던 분”이었고, 그 또한 거의 극장에 살다시피 하면서 국적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영화들을 접했다. 중학교 시절에 영화감독을 동경하기 시작했던 그는, 고등학생이 되어선 장차 감독이 될 거라고 주변에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였다. 요즘 같으면 ‘유망 직종’일지 모르겠지만, 1970년대에 ‘영화감독’을 꿈꾼다는 건 어른들이 보기에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집안의 반대로 연극영화과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요즘 현장에서 영화과 나온 친구들 보면 부러워요. 20대 초반, 그 젊은 시절부터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 테니까.”

 

영문학과를 선택하긴 했지만, ‘영화 찍는 일’에 대한 그의 열망은 여전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본 후엔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결국 2학년 때 대학을 중퇴하고 현장으로 간다. “그때 대학을 정상적으로 마쳤다면, 내가 과연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을지 궁금해요. 대학을 졸업한 후 충무로에 왔다면, 그래서 연출부 일을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을지……” 1980년대 충무로 연출부 생활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진) 영화진흥공사에서 나오던 <영화>라는 월간지에 번역 연재를 하고, 틈 나는 대로 영화 자막 번역 일을 하기도 했다(<아마데우스>의 한국 극장용 자막은 강우석 감독의 솜씨다). 너무 힘들 땐 복학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죠. 가끔 고등학교 때 친구들 만나는데, 그 친구들이 그래요. 그때(조감독 시절) 네 걱정 많이 했다고.(웃음).”

 

 

 

5년 동안 조감독 시절을 마치고, 그는 데뷔의 기회를 잡는다. 신문 사회면 구석에서 발견한, 농촌 총각 문제에 대한 기사는 그의 첫 작품인 <달콤한 신부들>(89)이 되었다. “그때 인터뷰 같은 데서 ‘영화가 재미있으면 되지…’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는데,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인들도 있었어요. 그래도 데뷔작으로, 한국에도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놈이 있다는 걸 충무로에 알린 것 같아요. 흥행은 잘 안 됐지만, 그래서 끊이지 않고 연출 제의가 왔던 것 같고.” 과거의 충무로 코미디와 강우석 감독의 코미디는 달랐다. 그는 사회적 현상을 코미디로 풀어냈고, 슬랩스틱이 아닌 상황과 캐릭터로 웃음을 만들었다.

 


현실 그리고 웃음. 이 두 가지는 강우석 감독의 지난 20년을 지탱한 두 축이다. TV 뉴스를 보다가 아이디어를 얻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89)는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고등학생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웃음’을 통해 전달하고 마지막 5분에서 크게 울린다.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90)에선 고학력 실업자의 이야기를, <투캅스>(93)에선 비리 경찰의 이야기를, 리얼리즘 드라마가 아니라 ‘코미디’로 풀어낸다.

 

그는 <실미도>(03)처럼 두툼한 역사적 무게를 지닌 영화에서도 유머를 아쉬워한다. “<실미도>는 할 수만 있다면 꼭 리메이크하고 싶은 영화예요. 영화가 워낙 뜨겁게 달려가다 보니, 마지막에 진한 감동은 있었을지 몰라도 유머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게 아직도 불편해요. 조금만 더 유머에 신경을 썼더라면, 감동도 더 컸을 텐데…. 아쉽죠.” <투캅스>나 <공공의 적> 같은 시리즈 영화가 가능했던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도 역시 대답은 ‘유머’다. “유머가 없으면 관객은 절대 시리즈를 찾지 않아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첫 흥행의 짜릿한 맛을 보았지만, 1990년과 1991년에 개봉된 네 편의 영화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이후에 교만해진 거죠. 관객에게 외면당한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어요.” 데뷔 후 처음으로, 그리고 너무 일찍 찾아온 슬럼프. 이후 그는 감독으로서 혹은 제작자로서 여러 번 고비를 겪게 되는데, 그가 곤경을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의도적으로 망각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사람들 불러서 술 마시면서 털어 버리려 하고, 빨리 다음 작품 들어가서 잊으려고도 하고.” 감독 데뷔 후 처음 겪었던 시련기였지만, 이 시기에 나왔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91)는 한국적 정치 영화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작품이다. 촬영 중에 모처에서 협박 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강우석 감독은 이 영화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대 최고의 캐스팅이었던 ‘최민수-최진실’의 <미스터 맘마>(92)로 다시 흥행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한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93)로, 그가 단순히 ‘코미디 감독’이 아닌 ‘중요한 감독’임을 증명한다. “웃다가 죽어도 좋다”라는 헤드카피는, 극장에 들어가기 전엔 일견 오만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극장 문을 나설 때는 100퍼센트 공감할 수 있는 문구였다. “<공공의 적>(02)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죠. 관객들이 박장대소할 수 있는 코미디를 했다는 자부심도 있고. ‘안성기-박중훈’ 콤비의 그 무시무시한 파워는 지금 봐도 놀라워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강우석 감독의 영화는) 시종일관 현실의 모순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가 싸움의 무기로 채택한 웃음은 1990년대에 걸맞는 전략”이라고 평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강우석 감독의 코미디를 보면서 관객이 터트리는 웃음은 현실의 ‘아이러니’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 웃음은 단순히 ‘재미’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꽤 날카로운 면을 지닌다. 둥글둥글한 웃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고 날을 세우기까지 감독이 겪는 과정은 피를 말리는 고통의 시간이다. “코미디는 ‘이면’을 보는 작업이죠. 폐부를 찔러야 하고. 시나리오보다 촬영 현장에서 만드는 웃음이 훨씬 큰데 ‘이게 터지지 않을까’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해버려요. 어떨 땐 하나를 건드렸는데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경우도 있어서, 하루면 끝날 장면이 이틀씩 가기도 하고요. 그래서 코미디 연출은 에너지 소모가 대단하죠. 서너 시간만 해도 체력이 다 떨어지니까. 코미디 찍을 때, 오히려 지나치게 예민해지기도 해요.”

 

이러한 부담감은 강우석 감독에게 ‘평균 이상’ 수준의 웃음을 원하는 관객의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투캅스>와 <공공의 적>의 강우석이 코미디를 만들었다고 하면, 관객들은 ‘다른 놈 수준으로 웃기면 죽어!’ 그러는 거죠.” 그러한 부담감은 <공공의 적 1-1: 강철중>(08, 이하 <강철중>) 때 극점에 달한 듯 보였다. 힘들었던 2008년 상반기 한국영화계에서,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강철중>은 마치 구원투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내가 나서서 ‘재미있는 영화 한 편 찍어드릴까요’라고 해야 했어요.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땐 <강철중>까지 무너지면 ‘한국영화 문제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으니까. <강철중>이 실망스러웠다면 관객들도 참담했을 거예요. 촬영 기간 3개월 동안, 정말 긴장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고.”

 

 

 

최근 10년 동안, 영화인 중 언론에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은 아마도 강우석 감독일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시네마서비스’를 만들며 본격적으로 제작에 뛰어든 그는, 이후 1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의 제작자가 되었고, 한때는 ‘비즈니스 맨’으로서 정신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98)과 <공공의 적> 사이에 있는 4년의 공백은, 그 흔적이다.


“(제작에 전념했던) 첫 번째 이유는, 더 많은 감독들에게 더 많은 영화를 찍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제작을 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궁극적으로 내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 측면도 많고요. 그리고 두 번째로, 불합리한 시스템을 개선하고 싶었어요. 나라도 뚫고 나가야 충무로가 산업화된다는 생각이었던 셈이죠.” 왜 그런 “나라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이해를 못하겠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내가 왜 충무로를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처럼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감독으로만 봐 주면, 재미있는 영화 열심히 찍으면서 즐겁게 살 텐데 말이죠.(웃음)”


 

충무로 토착 자본 시절에 데뷔해, 대기업 자본, 금융 자본, 창업투자회사 자본, 외국계 자본 등 숱한 성격의 ‘돈’을 접했던 강우석 감독에게 철학이 있다면 “영화는 돈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자본의 윤리’를 말한다. “카지노 잭팟처럼, 터지면 빠지는 일회성 자본은 문제가 있죠. 최소한 10년에서 20년은 봐야 해요. 기업이 영화에 투자할 때, 설사 취미로 하는 거라도 5년 이상은 지켜봐야 하는 거고요.”
 

 

<투캅스> 이후 직접 연출한 영화는 거의 모두 흥행에 성공해 손익분기점을 넘겼지만, 제작자로서는 꽤 아픈 실패도 있었고 그로 인해 몇 번의 위기를 겪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불도저처럼 꾸준히 영화를 제작했다. “내가 조금만 더 설치면, 한 해 한국영화 편수가 50편에서 60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신인 감독을 데뷔시키는 쾌감도 있고요. 그리고 영화로 돈을 벌면, 마음이 쫓겨요. 빨리 다음 영화에 투자해야 할 것 같아서.”


만들 필요가 없는 영화에 대해서는 냉혹하지만, ‘만들어져야 할 영화’에 대한 그의 신념은 대단하다. 대표적인 영화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한 <취화선>(02). “임권택 감독님 같은 분이 제작비 때문에 영화를 못 만들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왕의 남자>(05) 이전에, 이준익 감독에게 23억 원의 돈을 조건 없이 빌려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오로지 흥행만 생각하고 제작을 했다면, 내가 굉장히 왜소해졌을 거예요. 가끔씩 보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어디다 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다 돈한테 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결국은 주변 사람을 버리거나 영화를 버려요.”

 

 

 

조감독 시절까지 어언 25년을 돌아보며 그는 “영화 외엔 딱히 할 게 없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가끔 생각해요. 영화를 빼면, 과연 나한테 뭐가 남을까…. 나에게 영화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었나….”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마치 자기가 감독인 것처럼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은 현실적인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장 중요한 건 열정이죠. 일생 영화 하다가 죽겠다는 생각만 있다면, 뭐가 되도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최근 강우석 감독을 뒤흔든 영화는 <다크 나이트>. 아무리 잘 만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도 한두 군데는 허한 구석이 있는 법인데, 그는 이 영화를 보고 완전히 질려 버렸다. 잠시지만, 그는 좌절했다. “만약에 나에게 저 영화의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과연 화면에 구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어떤 열등의식까지 생겼죠.” 하지만 <다크 나이트>를 한 번 더 본 후, 오히려 편안하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차기작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풍자 코미디가 다음 작품이죠. 언젠가는 진짜 제대로 된 정치 코미디를 만들고 싶어요.” 사회를 뒤흔들만한 힘을 지닌 영화를 위해 꾸준히 나아가는 강우석 감독. 그에게 최종 목표가 있다면 “죽을 때까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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