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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준성

나 그 네 2009. 1. 21. 18:30

건축가 김준성

 

 



 

 

1976년 김준성은 가족들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연세대학교 건축학과를 다녔지만 건축의 'ㄱ'자도 맛보지 못한 신입생 때였다. 건축을 선택한 것도 우연이었다. "주변에 건축을 하겠다는 친구들이 집을 스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학 상담 때 담임선생님이 오히려 저에게 건축공학을 권해 주셨어요." 처음엔 그렇게 건축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회가 다양한 문화를 누릴 상황도 아니었고, 좋은 건축물을 접할 기회도 없었다.


브라질 이민으로 그는 다시 원점에 섰다. 당시 불안했던 한국 정치상황 때문에 부모님이 결정한 이민이었고, 당시만 해도 브라질은 기회의 땅이란 인식도 강했다.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유학이 아니라 이민을 갔던 거라 적응해서 살아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절실했어요." 브라질 이민은 그의 건축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제와 보니, 이민을 갔던 거나 첫 목적지가 브라질이었던 것 모두 참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브라질은 자유분방한 학풍이 있었죠. 덕분에 건축의 인문사회적인 면을 배울 수 있었어요. 포르투갈 아프리카 이탈리아 독일 등 여러 문화가 지역 토속 문화와 섞여 있는 브라질 풍토 덕에 타 문화에 대한 겁도 없어졌죠." 하지만 건축가로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도 여전히 남았다. "건축학부를 졸업하는데 거의 10년이 걸렸어요. 처음 한국에서 1년, 브라질에서 5년, 뉴욕에서 2년 건축을 공부했죠. 사실 뉴욕엔 영화 공부하러 갔어요. 그런데 영화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었어요. 도중에 학교를 쉬기도 하고 영화에도 기웃거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든 것 같아요. 건축이 단지 공학이 아니라 예술적 측면이 강하다는 걸 이해하게 됐죠. 그때 건축이 나에게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건축의 매력, 건축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데 10년이 걸린 셈이다.

 

 

 


건축가의 길을 오는 동안 김준성 씨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도 말한다. 그가 본격적인 건축 공부와 실무를 시작한 미국은 한마디로 격변하는 세계 건축의 중심이었다. 1980년대 초반 근대 건축의 대안을 모색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몰려오나 싶더니, 1988년 해체주의의 서막을 알린 건축전시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곧이어 근대건축에 대한 제3의 대안으로 지역주의가 힘을 얻었다.

"당시에는 그런 사조들의 표현적인 면에 관심을 가졌어요. 하지만 차츰 그게 건축의 본질이 아님을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건축의 서정적이고 시적인 면에 빠져들었죠." 프랫 인스티튜트 수업에서 폴란드 출신의 건축가 엘리자베스 딜러(Elizabeth Diller)를 만났고, 컬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하던 해에는 마침 세계적인 학자이자 비평가인 케네스 프램튼(Kenneth Framton)이 학장으로 부임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건축가 스티븐 홀(Steven Holl)의 사무소에서 일할 기회도 얻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큰 의미를 두는 것은 근대 건축의 마지막 거장으로 불리는 알바로 시자와의 인상적인 만남이었다.

 

"대학원에서 건축가의 작품을 연구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건축가를 고르는 시간에 늦게 강의실에 들어섰더니 과제로 남은 게 시자 선생님 밖에 없더라고요. 알고 보니 교수님이 제가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를 배운 것을 알고 일부러 시자 자료를 남겨둔 거였어요." 과제를 수행하면서 알바로 시자와 연락을 주고 받았고, 그렇게 시작된 시자와의 인연은 포르투갈 포르토에 있는 시자 사무실로 그를 인도했다. 김준성은 대학원 졸업을 잠시 미루고 시자 사무실에 입사 지원을 했고 그를 기억한 시자는 지원을 받아주었다. 그곳에서 보낸 2년 동안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김준성이 가지고 있는 시적 감수성과 콘크리트 덩어리의 유기적인 연결은 시자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김준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91년이다. 현재 그의 사무실은 발 디딜 틈 없는 강남에서 약간 비켜난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있다. 그는 "골목으로 올라오다 보면 창고 같은 건물이 보일 거예요" 하고 전화로 알려줬다. 말 그대로 콘크리트 벽에 창문도 보이지 않는 '창고 같은' 3층 건물이다. 하지만 좁은 현관을 비집고 들어서자 확 트인 중정(中庭)이 펼쳐지며 긴 계단이 하늘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이 '창고 같은 건물'이 바로 그가 한국에 들어와 설계한 처녀작이다. "한국에 들어오려고 계획했던 건 아니에요. 당시 '다리 갤러리'라는 건축전문 갤러리 개관전에 초대받았어요. 그 전시 때문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프로젝트를 하나 의뢰 받은 게 계기가 됐어요. 그게 지금 이 집이에요." 그 후 주인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그는 자기 작품을 임대해 사무실로 쓰고 있다.


한국을 떠난 청년에게 25년만의 서울은 낯선 도시였다. "20살에 브라질 상파울루를 보고 받은 충격보다 서른이 넘어 서울을 다시 만난 충격이 더 컸어요." 한국을 떠난 후로 처음 탔던 1991년 한국행 비행기에는 한국 사람들만 가득 차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둘러 싸여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모든 긴장감이 다 풀어졌지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가족 같았어요."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를 대면했을 때 그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그는 빼곡히 들어선 교회의 빨간 십자가들을 보면서 놀랐다고 한다.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라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획일적인 강남,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에 안착해 있다.

 

 

 

건축가 김준성은 파주 헤이리 아트 밸리의 조성 과정을 함께 한 조력자다. 헤이리 프로젝트는 1990년대 중반 파주 출판도시를 추진했던 사람들이 처음 논의를 시작했다. 파주 출판도시는 산업단지여서, 법적으로 주택이나 문화시설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인근에 파주와 연계해 생활할 수 있는 마을을 구상하게 되었고 소문을 들은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새로운 생활공동체를 세운 게 헤이리다.

 

김준성은 건축가 김종규와 함께 헤이리의 건축 코디네이터를 맡았다. 건축 코디네이터란 아무 것도 없는 땅 위에 헤이리라는 마을이 들어서게 하기 위한 지침을 만드는 사람이다. 파주와 마찬가지로, 보통 마을을 조성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시도를 했다. "지침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은 건축과 자연의 조화였어요. 그 조화를 이루기 위해선 시간에 대한 고려가 필수였죠. 마을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건축물이 지어질 때 건축위원회를 통해서 제안을 조율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프로젝트 설계도 진행했다. 헤이리 내에 <한길 북 하우스>와 <한길 갤러리>를 연결시켜 설계한 것이다. 그렇게 헤이리를 자신의 일부처럼 관심을 가지며 보낸 시간이 어느덧 7년이다. 헤이리는 '살면서 생산하고 판매하는' 유토피아적 생활공동체로 출발했지만 대중의 인기를 끌면서 '건축 전시장'이나 '디즈니랜드'로 전락했다는 비난도 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늘어나는 상행위 때문이다. 공동체라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상업적인 관광지가 된 것처럼 보는 시선도 많다. "그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양면성이에요. 문화는 문화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자본과 시장이 있어야 탄생하니까요. 오히려 주말에만 관광지처럼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365일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 해요. 아직은 헤이리에 그럴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게 더 문제죠."


 

헤이리 작업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김준성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꼽는다. " 헤이리 땅은 모두 사유지예요. 외부인 출입을 막고 싶으면 담을 쳐버리면 그만이죠. 마을 전체가 자연과 공존하도록 제안한 (저의) 건축 지침도 지키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어요. 헤이리가 가능했던 건 그곳 사람들이 한 공동체로서 서로 믿고 약속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에요."

 

헤이리를 계기로 건축가로서 대중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대중과 소통하는 것에 아주 소극적이었어요. 이젠 생각이 달라졌죠. 요즘 사람들은 건축이 가진 가치를 이해해요. 어떤 점에서는 자기 분야 밖에 모르는 건축가보다 아는 게 더 많지요. 다만 서로 의식구조가 다르고 의사 소통할 기회가 부족했던 거죠." 그에게 헤이리는 ‘7년 간의 작업’이라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건축이라는 전문적인 울타리 안에서 작업하던 그에게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건축의 사회적 가치를 실감하게 해 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는 헤이리에 두 개의 작품을 설계하면서 서로 다른 건물의 융화를 통해 도시를 통합하는 방법과 대지를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보다 섬세하게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진행한 김준성의 작업은 상당 부분 다른 건축가와의 공동작업이다. 무엇보다 헤이리 코디네이팅 자체가 거대한 공동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 건축사무소 숍(SHoP)이 디자인한 <한길 북 하우스>를 한국 현실에 맞춰 조율하고 완공시켰다. 파주의 <열린책들 사옥>은 건축가 서혜림과 공동으로 설계했다. 신촌의 <아트레온>에서는 메인 디자이너로서 대형 건축사무소 범건축과 함께 작업했다. 자신의 건축 성향이 분명한 건축가의 경우, 대부분 디자인에 대한 고집이 강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협업을 선호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별종인 셈이다. 협업이란 디자인을 조율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다. "협업은 부딪히고 싸워야 의미가 있어요. 처음부터 양보하고 수용할 생각으로 시작해서는 좋은 건축을 할 수 없어요. 굳이 저 자신만의 건축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협업 자체라고 하고 싶네요." 의견 충돌로 그가 얻는 건 새로움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 때문에 늘 의도적으로 협업할 계기를 만들죠. 혼자 매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아요.”

 

건축물을 설계할 때 그는 방법론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건물의 배치, 구조, 형태, 재료를 논리적인 흐름을 따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건물이 완성된 장면과 사람들이 느낄 분위기를 하나의 '총체적인 경험'으로 떠올리며 작업하는 경향에 가깝다. 이런 접근 방식은 협업에도 도움이 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기보다 감성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타자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그가 말하는 '새로운 것'은 시각적인 새로움이나 실험을 뜻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것이라도 그 과정이나 의도가 신선하다면 그것이 그가 찾는 새로움, 즉 '새로운 생각'이다. "최근에 시자 선생님이 한 잡지 인터뷰에서 '시각적으로 새로운 것, 그게 과연 새로운 것인가?'라고 했었죠. 공감도 하고 반성도 했어요. 겉모양만 아무리 바꿔봐야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죠. 요즘 건축의 요란한 경향을 꼬집어 지적한 말이었어요." 

새로움에 대한 진지한 갈망은 처음 한국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생각을 장악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새로움>을 위해서라면 <겉으로만 번쩍거리는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접어버릴 준비가 돼있다. 설령 다른 건축가라면 절대 포기하지 못할 아이디어라고 해도 말이다. 건축가 김준성에게 건축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너머에 담긴 대화와 소통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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