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유도선수 하형주

나 그 네 2009. 1. 16. 17:16

 

스포츠인 하형주

 



 

메달의 부푼 꿈을 안고 LA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의 기수는 하형주였다. 기수는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얼굴로 메달 획득이 유력한 선수가 맡곤 한다. 하형주는 LA올림픽을 앞두고 출전한 1981년 아시아선수권대회, 1981년 세계선수권대회, 1983년 범태평양선수권대회 등에서 꾸준히 입상하며 메달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시원스런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 듬직한 체격 등 외모도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1984년 LA올림픽은 어느 올림픽보다 국민의 관심이 쏠린 대회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직전 대회였으며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건너뛰고 8년 만에 출전하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옛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미국 등 서방 국가가 불참한 모스크바 대회에 이어 또다시 치러진 ‘반쪽 대회’였던 만큼 이전 대회들보다 메달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실제로 한국은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kg급 김원기가 대회 첫 번째 금메달을 딴 것을 시작으로 금 6, 은 6, 동메달 7개의 역대 최고성적을 올리며 금메달 기준 종합 10위 안에 들었다. 체력이 곧 국력이었던 시절, 국민들은 세계 10위권의 강대국이 된 것만큼이나 기뻐했다. 모든 메달이 극적이었지만 6개의 금메달 가운데 특히 불굴의 투지를 보인 하형주의 경기는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지만 하형주를 응원했던 이들은 아직도 당시 바짝바짝 타들어 갔던 입술의 감촉을 기억한다.

 

 

 

 

 

하형주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부터 팬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 대회 개막 40여 일을 앞두고 훈련 도중 허리를 다쳤다.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야 했던 하형주는 입원한 지 열흘 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몸이 채 낫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메달을 따겠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금메달을 목표로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을 잘하고 못하고는 성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어느 정도 이겨 낼 수 있느냐,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했다.”


대진 운은 썩 좋지 않았다. 8강전에서 만난 미하라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하형주였지만 이상하게도 미하라와는 LA올림픽 전까지 한 번도 붙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생각에 미하라에 대한 분석은 끝내 놓고 있었다. 준비가 돼 있었기에 불안한 마음은 좀 덜했다.

 

미하라의 주무기는 허벅다리걸기였다. 하형주는 미하라의 허벅다리기술을 씨름의 들배지기를 응용한 기술로 제압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미하라는 하형주에게 허벅다리걸기 기술을 썼다. 하형주는 마음 속으로 미리 짜놓았던 대로 들배지기로 미하라를 들어 올려 내던졌다. 한판을 선언해야 하는 완벽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주심은 절반을 선언했다. 심판들이 일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하형주의 기술은 심판들도 처음 보는 씨름을 응용한 것이었다. 판정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미하라는 다시 허벅다리걸기를 시도했다. 하형주는 또다시 미하라를 번쩍 들어 내리꽂았다. 또 절반. 두 번의 절반으로 하형주는 한판승을 거두고 4강에 올랐다. 4강전에서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독일의 군터 노이로이터를 만났다. 만만찮은 상대였다. 노이로이터에게 효과를 내준 하형주는 경기 종료 35초 전까지 이렇다 할 기술을 걸지 못하고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결승전을 눈앞에 두고 이대로 무너지는 건 아닐까.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 하형주의 전광석화 같은 발목받치기에 노이로이터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유효. 역전승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함성을 질렀다. 너무 가슴을 졸인 나머지 심장마비로 숨진 이도 있었다.


사실상 결승전이었던 미하라, 노이로이터와의 경기를 끝내고 나니 결승전은 쉬워 보였다. 금메달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격렬했던 이전의 두 경기로 하형주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예상을 깨고 결승전에 올라온 비에이라는 경기 내내 도망만 다녔다. 경기가 끝난 뒤 비에이라는 오히려 한판으로 지지 않은 것에 만족했는지 크게 기뻐하기까지 했다.

 

 

 

하형주는 경남 진주에서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날 때부터 워낙 기골이 장대해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한마디로 장군감이었다. 실제로 그런 꿈을 가진 적도 있다. 유도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직업 군인의 길을 걷고 있지 않았을까. 중학교 때까지 가졌던 꿈이 육사 가서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큰 체격만큼 힘도 장사였다. 진주 천전초등학교 씨름판에서는 하형주를 당해 낼 아이가 없었다. 진주상고에 진학한 뒤에는 씨름과 레슬링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문학 소녀였던 누나의 영향으로 글을 쓰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던 하형주는 그러나 운동에 더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산체고로 옮겨 본격적으로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막연히 좋아서 시작한 유도지만 특유의 끈기와 힘으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운동을 위한 운동을 하진 않았다. “운동 선수 대부분이 일단 운동이 좋으니까, 가장 잘하는 것이니까 열심히 한다. 나도 유도를 하는 동안 그랬다. 오로지 유도 생각뿐이었다. 경기에서 이기는 꿈, 지는 꿈, 잘 때도 계속 경기하는 꿈을 꾸고. 그런데 운동에 100% 자신을 바치면 나이 들어 체력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할 텐가. 은퇴한 뒤 갈팡질팡 하는 선수를 많이 봤다. 승부와 성적에만 지나치게 몰입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내기 운동을 할 때도 그랬고 요즘 젊은 선수들 일부를 봐도 그렇다.”

 

그는 일찍 머리가 트인 편이다. 부산체고를 졸업하고 동아대에 진학하면서 운동선수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하형주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운동은 젊어 한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했다. 고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으니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곧잘 했다. 교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만난 교수님들을 보니 ‘나도 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유도만 잘하면 교수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스포츠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동아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선수 생활을 했던 것이 연구의 바탕이 됐다. 경기 도중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정신력과 의지력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해 더욱 알아보기 위해 심리학을 택했다. 지도자들이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며 “내가 지도자라면 이건 배울 점, 저건 고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공부의 토대가 됐다.

 

 

 

그는 연구자다. 유도복을 벗은 지 20년이 넘었고 지도자로 선수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매트를 떠난 지 그만큼 오래 됐다. 그러나 숨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참으며 치렀던 경기들은 가끔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하형주는 1984년 LA올림픽 외에 기억에 남는 경기로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스가이와 맞붙은 결승전을 꼽았다. 하형주와 스가이는 1985년 서울에서 벌어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일본 유도계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미하라를 무참하게 무너뜨린 하형주를 잡기 위한 방책으로 ‘하형주용 선수’를 골라 국가대표로 선발했다. 그가 바로 스가이다. 일본 유도는 선수층이 두껍기 때문에 상위권 선수들의 실력은 엇비슷하다. 스가이는 당시 일본 국내 3위 정도였다. “생전 처음 대결해 보는 선수였는데 운동 감각이 남달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결국 빗당겨치기 한판으로 졌다.”

 

 

 

하형주는 자존심이 상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달래며 1년 동안 이를 갈면서 훈련했다. 이듬해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전에서 스가이와 다시 만났다. 세계 유도계가 주목한 경기에서 하형주는 유효로 스가이를 눌렀다. 이로써 둘의 전적은 1승1패. 세계 유도계는 둘의 세 번째 대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하형주와 스가이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자긍심을 안고 있던 국민들은 하형주가 4년 전과 같은 승리의 드라마를 다시 써 주기를 기대했다. 1988년 9월 30일 유도 95kg급 경기가 열린 장충체육관은 만원 관중으로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했다. 하형주는 1회전에서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벨기에의 로베르트 반드왈에게 가로누르기 한판으로 졌고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스가이는 2회전에서 무너졌다. 

 

 

 

 

하형주는 스포츠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이제는 치열한 승부의 세계인 경기장에서 한발 물러서서 한국 스포츠계의 큰 틀을 읽는다. 그는 체육이 발전해야 나라도 발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18대 총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다. 하형주의 ‘체육 발전론’은 하형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980년대 당시 ‘스포츠 대회 성적이 곧 국력’이라는 생각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하형주는 온 국민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정책을 만들고 싶다.

 

“경제가 발전해서 부가 쌓인다고 하루에 밥 다섯 끼 먹는 것도 아닌데 요즘 지나칠 정도로 경제, 경제한다. 우리나라는 경제가 발전한 정도에 비해 문화 체육 등 다른 분야의 발전에 관심을 덜 두는 것 같다. 지육, 체육, 덕육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덕육은 없어지고, 체육은 더 많이 없어지고 지육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체육 관련 법령은 1960년대 그대로다. 체육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신체도 정신도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 그러나 공천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그 뜻을 미처 펴지 못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큰 몸집에 비해 체력이 무척 약한 것 같다. 안타깝다. 체육 정책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국회도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로 구성돼, 사회 각 분야가 고르게 발전할 수 있도록 여러 가치들이 뒷받침해야 한다.”

 

 

 


하형주는 올림픽 2연속 우승을 기대했던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그리고 은퇴한 뒤에는 특별히 대중의 시선을 받을 만한 곳에 나서지도 않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억센 사투리로 어머니를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흔든 여운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보기 힘들었던 건장한 체격에 잘 생긴 얼굴 때문일까. 이런저런 까닭으로 무척이나 더웠던 1984년 여름, 속이 시원한 경기를 펼친 그의 강인한 승부 정신을 못 잊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두가 이유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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