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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선수 이에리사

나 그 네 2009. 1. 30. 12:43

 

스포츠인 이에리사

 

 


 

 

1973년 제32회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한국 선수단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대회 몇 달 전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했고 현지 적응을 위해 유럽 전지훈련까지 마쳤다. 당시 경제 사정에서 해외 전지훈련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바로 전해인 1972년에는 스칸디나비아 오픈에 참가하며 유럽 탁구에 대한 적응도 마쳤다.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제31회 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 일본에 2-3으로 패하며 아쉽게 3위에 그쳤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정상이었던 일본과 대등한 경기를 했고 이에리사, 정현숙 등 신예들의 가능성을 발견했기에 탁구계는 크게 고무됐다.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대회인 만큼 선수단은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끊임없이 들었다. 이에리사는 “공산국가여서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큰 부담은 없었다. 불리한 점이 있어도 그걸 극복해 내는 게 선수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한국은 개인전보다 단체전에 주력했다. 단체전은 일본과 한국, 중국이 우승을 다투는 3파전 양상이었다. 4단식 1복식으로 진행되는 단체전에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에, 이에리사-박미라 조를 복식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에리사는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사실상 팀의 에이스였다.


2개 조로 나뉘어 풀리그를 벌여 각 조 1,2위를 차지한 4개 팀이 결승리그에 진출하는 예선리그에서 한국은 중국, 루마니아, 서독, 스웨덴, 프랑스, 유고와 함께 B조에 속했다. 한국은 첫날 루마니아를 3-0으로 제압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분위기를 탄 대표팀은 둘째 날 서독과 스웨덴을 각각 3-0으로 눌러 3연승을 달렸다. 3일째에도 프랑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역시 3-0으로 나란히 이겼다. 5연승을 하는 동안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는 완벽한 경기력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중국전이 고비였다. 결승리그 진출은 이미 확정됐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예선리그에서 겨룬 팀은 결승 리그에서 다시 싸우지 않고 예선리그 성적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회 규정상 중국전은 우승을 위해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나란히 5연승으로 1, 2위인 한국과 중국의 대결은 마치 결승이나 진배없는 중요한 경기였다.


 

한국은 중국을 맞아 첫 단식에 이에리사를 내세웠다. 상대는 세계랭킹 2위 정희영. 정희영은 전진속공형으로 중국팀에서 가장 강한 선수였다. 이에리사는 1세트에서 자신의 주특기인 루프 드라이브를 앞세워 속전속결로 빠르게 승부를 걸어갔다. 1세트는 이에리사의 전략이 먹히면서 21-15로 가볍게 승리했다. 정희영은 2세트에서 이에리사의 드라이브를 봉쇄하기 위해 빠른 쇼트 공격 위주로 맞섰다. 결국 정희영이 21-18로 2세트를 따내면서 경기는 3세트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3세트에서 이에리사는 시간차 공격과 빠른 3구 공격을 통해 상대의 흐름을 뺏어와 20-15까지 앞섰다. 경기는 거의 끝난 듯했다. 하지만 서브권 5개를 가진 정희영은 빠른 서브로 이에리사의 백핸드 쪽을 공략했다. 정희영은 3구에서 연이어 스매싱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점수는 20-19, 한 점 차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마지막 포인트를 따내며 21-19로 승리해 세트스코어 2-1로 1단식을 따냈다.


첫 단식에서 기선을 제압한 한국은 2번째 게임에서 셰이크핸드 정현숙마저 지난 대회 세계선수권자 호옥란을 제압해 2-0으로 승리를 눈앞에 뒀다.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였지만 한국 선수들이 잇달아 승리를 거두자 ‘코리아’라는 응원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에리사-박미라 조와 중국의 정희영-장립 조의 3복식 대결은 초반부터 난타전이 벌어지며 혼전이 거듭됐다. 그러나 한국은 아깝게도 듀스 끝에 20-22로 첫 세트를 놓치고 2세트마저 내줘 복식 경기를 내줬다. 이에리사는 4단식에 다시 나섰다. 상대 선수는 호옥란이었다. 이에리사는 강한 드라이브와 스매싱으로 페이스를 유리하게 이끌어 1세트 21-15, 2세트 21-18로 세트스코어 2-0의 완승을 거뒀다. 중국의 두 에이스 모두가 이에리사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한국은 이날 승리로 1승을 안고 결승리그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은 다음 날 A조 2위 헝가리를 3-1로 격파했다. 이제 남은 경기는 지난 대회 준결승에서 패한 일본뿐이었다.

 

 

 

4월 9일 일본과의 마지막 대결은 결승리그 전적 2승인 한국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결승리그에서 중국에 패해 1승1패가 된 일본이나 2승1패의 중국보다 앞서 있었다. 설사 일본에 패해 중국, 한국, 일본이 나란히 2승1패가 되더라도 세트스코어 2-3으로 진다면 득실에 앞서 우승할 수 있었다. 1단식은 이에리사와 일본 랭킹 1위인 요코다의 대결이었다. 에이스의 맞대결이었다. 이에리사는 초반 긴장한 탓인지 연이어 실수를 범했지만 점차 자기 페이스를 되찾으며 롱드라이브와 쇼트로 요코다를 쉽게 제압했다. 커트 위주의 수비형 선수 요코다는 이에리사의 공격을 받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에리사는 단숨에 두 세트를 이기며 1단식을 따냈다. 2경기는 반대로 한국은 수비형 선수 정현숙, 일본은 공격형 선수 오제키를 내세웠다. 정현숙은 쇼트 커트로 상대의 공격을 봉쇄하면서 날카로운 반격을 펴 초반부터 계속 리드를 잡았다. 그러나 ‘촉진 룰’에 걸리면서 더 이상 수비 위주의 경기를 할 수 없게 된 정현숙은 19-21로 1세트를 내준데 이어 2세트도 20-22로 아쉽게 패했다. 3복식은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요코다-오제키 조와 맞섰다. 최고의 컨디션을 보인 이에리사는 박미라의 도움을 받아 연신 강한 공격을 날렸다. 이에리사-박미라 조는 단숨에 두 세트를 따내며 3복식을 따냈다. 이미 한국의 우승은 확정됐다. 이에리사는 4단식에서 2년 전 준결승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오제키에게 세트스코어 2-1로 이겨 3-1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마지막 이에리사의 스매싱이 성공하는 순간 한국 선수단은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 선수단에게 쏟아지는 박수와 선수들이 흘린 눈물로 경기장은 뜨거웠다. 언론은 ‘사라예보의 기적’이라며 선수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단체전에서 19전 전승을 기록한 이에리사는 우승의 일등공신이었다. 개인전에서는 어이없이 1회전 탈락에 그쳤지만 단체전 우승만으로도 이에리사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이에리사는 “단체전 우승을 거두고 난 뒤 약간 맥이 풀렸다. 아무래도 개인전보다는 단체전에 주력하다 보니 무리한 상태였다. 너무나 어깨가 아프고 피곤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일”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탁구대표팀의 세계선수권대회 제패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거둔 세계대회 우승이었다.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는 스포츠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민훈장 최고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탁구 열기 또한 온 나라를 뒤덮었다. 동네마다 탁구장에는 제2의 이에리사를 꿈꾸는 어린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 김연아처럼 되고 싶어 스케이트장에 소녀들이 너나 없이 몰려드는 것보다 더 심할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뒤 쉽게 무너지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뒤에도 국내 최강자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에리사는 국내 최고의 탁구대회인 종합선수권 7연패를 달성했다. 1969년 15살의 나이로 첫 우승한 뒤 1975년까지 7년 동안 대회 정상을 밟았다. 이에리사의 7연패는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국가대표로도 꾸준히 활약했다. 1975년 캘커타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었고 1976년에는 서독오픈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아버님이 집에 탁구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이에리사가 처음 라켓을 잡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에리사’란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52년 즉위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서 따왔다. 3남5녀의 일곱째 딸은 일찌감치 뛰어난 탁구 실력을 보였다. 이에리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 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더니 충남 홍성여중 1학년 때 참가한 전국 종별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를 펼쳤다. 서울 문영여중 손병수 코치는 그런 이에리사를 눈여겨보고 서울 전학을 권유했다. 아버지 이승규씨는 딸의 서울행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곧 허락했다. 이에리사는 중학교 3학년 때 언니와 오빠가 있는 서울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언니가 싸다 준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업이 끝난 뒤 하루 6시간 강훈련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원래 하나에 몰두하면 끊임없이 파고드는 성격과 강한 승부 근성 덕분이었다.


그해 5월 이에리사는 전국학생 종별대회 개인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건은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3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났다. 이에리사는 학생부에서 일찌감치 우승하더니 일반부에서도 연승행진을 이어갔다. 결승 상대는 베테랑 김인옥(한일은행)이었다. 두 선수는 경기 내내 막상막하의 접전을 펼쳤다. 이에리사는 1-1로 맞선 3세트에서 21-19로 이겨 세트스코어 2-1로 승리했다. 15살 소녀가 자신보다 7, 8살 많은 선배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종합선수권 우승을 차지하자 탁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생부 대회에서 우승한 뒤 바로 그 다음 날 일반부에서 우승했다. 정말 어린 나이에 한참 나이도 많은 선배들을 모두 이기고 우승했으니 다들 놀랄 만했다.”


이에리사의 플레이 스타일은 더욱더 파격적이었다. 이에리사는 여자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한 드라이브를 구사했다. 지금이야 드라이브가 일반적이지만 당시 여자 선수가 힘 있는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에리사는 드라이브를 앞세운 공격적인 탁구로 국내 무대를 휩쓸었다. 다음 해인 1970년 이에리사는 국내무대 7관왕을 이룬 데 이어 국제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제10회 아시아선수권에서 주니어부 단식 우승을 차지했고 단체전 우승도 이끌었다. 어느새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의 미래를 상징하게 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금 13, 은 10, 동메달 8개를 따 내며 종합 7위에 올랐다.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그 뒤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많다. 지도자는 물론이고 선수들 뒷바라지를 맡은 체육인들이 그들이다. 2005년 3월 여성으로는 처음 태릉선수촌 촌장에 부임한 이에리사 역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에리사는 촌장으로 부임한 뒤 여러 가지 파격적인 일을 벌였다. 여자 선수 숙소를 늘리기 위해 벌인 시위가 대표적이다. 이에리사는 여자 숙소가 모자라는 걸 알고 문화관광부 승인을 얻어 숙소 확장을 위한 공사 허가와 지원금을 얻었다. 그러나 태릉이 문화재라는 이유로 문화재청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리사는 생각을 같이 하는 선수, 지도자들과 함께 문화재청 앞에서 시위를 벌여 허가를 얻어냈다.

 


비인기종목 선수들을 위해 태릉 선수촌 훈련 가능일을 105일에서 180일로 늘린 것도 이에리사가 이룬 일이다. 훈련 가능일 외에는 선수들과 지도자들에게 훈련수당이 주어질 수 없는데 날짜가 턱없이 모자라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리사는 훈련일수를 늘려주지 않으면 선수촌 문을 닫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여 훈련일 확대를 얻어냈다. 선수시절의 공격적이고 역동적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보였다. 이에리사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도자가 되면서 예전 선수 시절 지도자 분들의 마음을 잘 알게 됐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처럼 선수들에게 쏟는 나의 감정도 비슷하다. 태릉은 나의 집과 같은 곳이다. 나는 태릉선수촌 1세대 출신이다 여기 모인 모든 선수들이 나의 동생 같고, 자식같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선수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 자체가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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