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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황두진

나 그 네 2009. 2. 2. 12:54

 

건축가 황두진

 

 



 

황두진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그의 <무무헌>, <취죽당>, <쌍희재> 등 한옥 프로젝트가 일간지에 소개된 후다. 그는 이후 새로운 형식의 한옥이 현대 주거 문화의 한 풍경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최근 경향을 이끄는 인물로 주목 받았다. 물론 그는 현대 건축을 전공하고 모더니즘의 수혜를 입은 현대 건축가다. 그럼에도 그가 한옥으로 알려졌단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한옥’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통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다. “19세기 조선인들을 위한 한옥이 아니에요. 21세기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 생활방식, 그리고 집에 대한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현대 건축’을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가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1980년대는 1920~30년대에 국내에 유입된 모더니즘 건축이 한창 전성기를 맞고 있던 시기였다. 동시에 소위 전통 논쟁이 활발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전통의 재해석 없이 한옥의 원형을 살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팽배했다. 창작에는 복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두진의 생각은 좀 달랐다. “나는 한옥과 한국의 전통 주거 건축이 다르다고 봐요. 사실 한옥이란 단어가 생긴 것이 100년 남짓 밖에 안 되었거든요. 한옥은 서양 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소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즉 자생적인 건축을 가리키기 위해 생긴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한옥은 전통 건축이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겼던 개념이지요. 근대성의 씨앗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한옥 자체를 전통 건축과 다른 것으로 보고자 해요.”

 
우리나라의 전통 주거 양식은 1900년대 초 도시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구조가 변형됐다. 이전에는 없던 지하실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서구 문명과 경쟁하며 변형된 새로운 한옥들을 주목한다. ‘훌륭한’ 고전적인 전통 가옥에 밀려 방치된 채 그 맥이 끊어졌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물론 학인당, 민가다헌 등 문헌적인 사료로서 당당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대부분 얼치기 집으로 치부되어 왔죠. 하지만 분명 자생적인 한국적 근대 건축의 씨앗을 품고 있는 한국형 현대 건축인 한옥이 전국 곳곳에 굉장히 많습니다. 전 그렇게 끊겨 있던 한옥의 맥락을 창조적으로 이어갔으면 해요.”

 

 

 

그는 공공연히 자기를 ‘동네건축가’라 부른다. 한옥에 대한 관심의 저변에도 현대건축가로서 그의 ‘동네건축가론’이 깔려 있다. 서울대 건축학 학부와 대학원 졸업 그리고 예일대 건축대학원 졸업. 건축가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를 떠올려보면 ‘동네건축가’란 너무 소박한 명칭이 아닐까.

 

“군대를 제대한 뒤에 내가 건축가로서 과연 자질이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2전 3기해서 국비장학생으로 뽑혔죠. 그렇게 예일대학 건축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예일대학에서 보낸 삶은 소도시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예상 못한 선물을 주었다. “그때 저와 같이 학교를 다녔던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은 예일대학교가 있는 뉴헤이븐을 싫어했어요. 주말만 되면 다들 뉴욕에 가곤 했죠. 전 이해가 안 됐어요. 작은 도시라 자전거를 타고 산이며 들이며 바다며 돌아다닐 수 있었죠. 대학 도시여서 도시 안에서는 좋은 전시와 강연이 넘쳐났고요. 이렇게 좋은데 왜 굳이 뉴욕엘 가나, 생각했습니다.”


 

이 시기는 오늘날 황두진표 건축론의 중심에 있는 ‘동네건축론’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 뉴헤이븐이라는 도시와 도시의 역사를 가르치는 수업이 있었어요. 저한테는 상당히 쇼킹한 사건이었죠. 이렇게 국제적으로 유명한 학교에서 이 작은 ‘동네’에 관심을 기울이다니. 이걸 가르치기 위해 수업이 따로 개설돼 있다니. 놀라웠죠. 이건 마치 서울대가 신림동을, 연세대가 신촌에 대한 과목을 개설한 거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우리나라에선 지금도 생각하기 힘들죠. 사실 우리나라에서 동네란 건너뛰어도 되는 대상이거든요.” 그렇게 황두진은 동네의 이슈를 글로벌한 이슈로 끌어올린 그들의 사고에 흥미를 느꼈고, 비로소 동네라는 이슈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유학을 마친 그는 미국 현지의 김태수건축사사무소에서 4년간의 실무를 익히고 1997년 귀국했다.

 

 

 

서울에 돌아와 3년간은 김태수건축사사무소 서울지사를 맡아 일했다. 황두진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한 건 2000년이 되어서다. 서울 통의동에 개인 아틀리에를 열면서 그가 결심했던 건 단 하나, 어설픈 인터내셔널은 되지 말자였다. “수입 브로커가 되는 게 정말 싫었어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 한국 토양에 무작정 적용하는 게 싫었죠. 어떻게든 서울이라는 텍스트를 읽어서 내 영양분으로 삼고, 또 서울을 내 건축의 고향으로 삼겠다 생각한 거죠.”

그는 이후 주변의 흡수 가능한 것들을 먼저 시도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프로젝트는 도서출판 열린책들 사옥. 대지는 경복궁 옆이었다. 역사적인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의 시간적 공백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풍경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매력이자 특징을 프로젝트에 적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집과 길이 그대로 직접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해냄출판사 사옥, 가회헌, 춘원당 등 다수의 개인, 공공 현대건축 혹은 한옥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며 통의동, 더 넓게 말해 서울이란 동네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지금의 그의 건축 어휘를 심화시키는 프로젝트를 만났으니 바로 북촌에 위치한 가회헌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한옥과 현대 모더니즘 건축물 사이의 딜레마와 고민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이는 황두진이 서울의 다양한 건축을 다루며 고민해 오고 있는 주제다. 그는 가회헌 프로젝트에서 ㄱ자나 ㄴ자 형태의 일반적인 한옥 평면인 아닌 ㅅ자 평면과 건식 지붕 구조를 새롭게 시도했다. 건식 지붕은 서까래 위에 다시 한 번 지붕구조를 만들어 지붕의 곡선을 잡고 흙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구조다. 한옥은 한옥이되, 고전적인 문화재 한옥도 아니요, 개량 한옥도 아닌 현대식 창작 한옥을 실현한 것이다.

 

 

 

사실 그가 말하는 동네건축가는 한편으론 매우 소박한 단어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축가로서 황두진이 기대하는 꿈과 야망이 담겨 있다. “건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건축가의 명성을 측정하는 잣대 중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이 있어요. 자기 사무실과 프로젝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성공했다는 거죠. 즉 해외 프로젝트가 많을수록 성공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감동받는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도 본질적으로는 동네 건축에서 시작한 사람들이거든요.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사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고, 마리오 보타를 이해하기 위해선 건축을 꼭 시계 만들듯 하는 스위스의 수공예적인 기질을 이해해야 하죠. 렘 쿨하스도 마찬가지에요.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지형이 워낙 재미없고 단조로워요. 주거와 자연을 조화롭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그만의 어휘가 형성됐죠. 어쨌든 그들도 시작은 동네에서 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경우에요.” 다만 그 시도들 중 보편적인 건축으로 머물지 않고 국제적인 어휘로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평범한 동네 건축가와 국제 건축가와의 차이일 것이다. 

 

“내게는 비틀즈가 또 다른 롤 모델이에요. 비틀즈는 영국의 조그만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동네에서 제일 잘 한다 소리를 듣더니, 좀 있다가는 리버풀에서 제일 잘한다, 그러더니 런던에서 제일 잘한다, 급기야 유럽 전체, 미국에서까지 성공했죠. 이에 비해 우리는 중간 단계를 생략하려는 경향이 커서 큰일이에요.”
최근 문화 예술계를 보는 그의 우려가 담긴 말이다. “요즘은 모든 분야가 자본과 시장에 의해 평가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건축도 마찬가지예요. 본연의 건축이 추구하는 순수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데, 요새는 스타 건축가의 개인적인 명예나 명성이 잣대가 되어 좋은 건축, 나쁜 건축으로 양분되는 것 같아요”

 

 

 

그는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게 건축가의 첫 번째 목표다. 다음으로 거기서 삶이 풍부해지고, 문화적 만족을 얻는다면 좋을 것이다. 마지막이 비로소 건축가로서 국위선양을 하고 명성를 얻는 것이 다. “첫 번째, 두 번째 목표도 제대로 추구하지 못하면서, 세 번째만 추구하는 건 잘못된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좀 그런 경향이 있죠. 이건 태도와 철학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가 한옥에 기대하는 것이 크다. “현대 건축은 현대 미술만큼이나 상당히 성공한 프로젝트에요. 전 세계를 바꿔놨으니까요. 소위 비판적 지역주의라 불리며 각 지역의 풍토에 맞게 변화했죠. 한옥은 건물 짓는 방식 자체가 한반도라는 기후적 지리적 문화적 풍토에 뿌리 박고 있어요. 제가 한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죠. 게다가 현대에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이 커요. 요즘처럼 인간, 환경과의 조화가 중요한 시점에 한옥은 천연재료로 지어지잖아요.”

 

그러나 한옥에 대한 그의 진보적인 생각은 한옥을 문화재 관점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하려는 사람들과 마찰을 빚기 일쑤다. “사실 기술적으로는 한옥을 현대 건축으로 끌어들이면서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거의 없어요. 단열, 냉난방, 정보통신, 보안시스템 등등 어지간한 것은 문제 해결이 쉽습니다. 마치 한옥 구조 자체가 원래 현대적 시설을 받아들이게끔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죠. 흥미진진하기도 하구요. 어려운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사람들의 선입관이더라구요. 그걸 극복하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종종 건축물 심의 과정에서 드러났다. “어떤 분들은 제가 한옥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한옥이 아니니 제발 그런 일 좀 하지 말라’고 하시기도 해요. 허가를 내주지 않아 곤란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에요. 물론 저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설득해야 한다고 여기고 노력해요. 그렇지만 사람의 고정관념만큼 어려운 장애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동네 건축가로서 그의 바람은 무얼까. “서울은 아직도 서울다운 건축을 못 만들고 있어요. ‘서울답다’는 건 서울의 느낌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게 아니에요. 서울이란 도시의 조건, 예를 들면 산이 많고, 한강이 흐르고, 사계절이 뚜렷한 점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건물 스타일과 건축법을 얘기하는 것이죠. 물론 저도 찾아 나가고 있어요. 올해부터는 우리 사무실에서 한 달에 하나 정도 간단하게 제안해 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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